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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

Summary:

카일로가 정확히 어떤 생을 거쳐왔는지는 몰라도, 헉스는 그가 가진 한이 자신의 것과 아주 유사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다만 그 한을 해결하려는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왜 카일로는 자신의 한이 낳은 결과로 이리도 고통받을까? 헉스 자신은 그 한이 낳은 결과로 이렇게 서 있는데.

Notes:

*2019.08.19 작성, 2020.11.21 수정

Work Text: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한을 가진다. 살면서 그 한을 어떻게든 풀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는 줄도 모르고 그 크기를 불려 평생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는 한도 있는 법이다. 그런 한은, 보통 생의 섭리와는 다르게 오래될수록, 그러니까 늙을수록 더욱 원초적이고 강렬한 빛깔을 띠는 것 같았다. 하기는 어린아이만큼 원시적인 상태의 인간이 어디 있겠나. 그렇기에, 어린 시절에 가진 한은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기 마련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의 대단한 아버지가 그를 비천한 어머니에게서 거두지 않았더라면, 그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었을까? 그가 그의 아버지를 죽일 마음을 먹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답할 수도 없고, 답할 가치도 없는 우스운 가정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자리, 이 방안에 서 있는 이유를 설명해보라면, 그 어린시절 이론이 정답을 밝혀줄 수 있을 듯하기도 했다. 그가 벌레 한 마리도 잡아 죽이지 못했을 만큼 유약했을 적에, 헉스는 아버지의 얼굴보다 아버지의 신발이 차라리 더 익숙했다. 그 얼굴을 보려면 당시의 가느다란 목을 꺾어 올려다 봐야 했는데,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보통 초상화에서 보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위압적으로 보였으며 아예 어디 애비를 그렇게 치켜 보냐고 불호령이 떨어질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바닥을 향하던 시선도 그러나 시간이 가고 그의 키와 한이 덩달아 커질수록 점차 바닥과 평행을 이루어갔고, 마지막 순간에는 다시 아래로 향했다. 그때는 신발이 아닌 다른 것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브랜돌 헉스, 비석에 새겨진 문자가 그의 시선에 미치지 못하는 게 헉스는 퍽 마음에 들었다. 고개를 숙여 누군가를 바라보면 마음 속에서 묘한 쾌감이 꿈틀거린다는 사실을 이제 그는 깨끗이 인정했다. 달리 숨겨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여기에 서있다. 한 사람이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넓은 체육관 바로 옆 탈의실에 그는 약 이십 분 전에 도착했었다. 벽 너머로 무언가를 휘두르는 듯한 소리, 공기가 웅웅거리며 공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늦게까지 할 심산인가? 정확한 시간을 지키는 것이 모든 일의 근간임을 모르는 족속들을 헉스는 지독히도 싫어했지만 이번만큼은 봐주기로 했다. 체육관 쪽의 벽에 몸을 기대고 뒤통수를 살짝 대자, 마침 저 너머 무언가가 박살나는 진동으로 머리카락이 미세히 흔들렸다. 눈을 감고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광경과 검무를 상상하는 일은, 이십분 째 그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는 헉스에게도 제법 만족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실물을 감상하고도 싶었지만 그런다면 불처럼 화를 낼 게 뻔했다. 훈련에 방해가 된다고, 저 널따란 체육관을 이 시간대에는 혼자 전세라도 낸 듯 독차지하기까지 한 위인이었다. 그의 새로운 슈프림 리더는.

실제로 저 모습을 딱 한 번 목격한 적은 있었다. 아직 슈프림 리더께서 살아있을 때였다. 호출 명령이 떨어져 발을 옮기는 와중에, 알현실로 가는 복도와 체육관으로 향한 복도가 엇갈리는 지점을 지나치려 하는 찰나였다. 밤이 되어가는 시간대라 복도가 싸늘하리만치 조용했던 것, 저 멀리 체육관으로 통하는 문이 반쯤 열려 있었던 것, 몰래 벨트에 심어 놓은 위치추적기의 상태로 보아 지금은 저 안에서 그 혼자 막 훈련을 시작한 참이었던 것 모두가, 직진하려던 그의 발길을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돌려버렸으리라.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가 본 광경은 뜻밖이었다. 평소 헬멧을 포함해 온 몸을 가리고 다니던 이상한 로브 같던 차림은 온데간데 없고, 맨 얼굴을 훤히 드러낸 채 민소매 셔츠를 입고 훈련에 열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붉을 라이트 세이버를 장식하듯 쉴새없이 휘날리는 검은 물결의 머리칼, 한껏 상기된 두 볼과 그 위로 흘러내리는 땀방울, 핏대 선 목덜미를 따라 양 옆으로 떨어져내리는 다부진 상체. 천장에 붙은 전등빛을 받아 음영이 또렷하게 지는 팔근육을 보면서, 헉스는 그 꼴도 보기 싫었던 존재에게 처음으로 입맛을 다셨더랬다. 첫 번째로 몸을 섞은 건 훨씬 후의 일이긴 하지만, 아마 그때의 그 광경이 시발점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가 이런 상념에 잡혀있을 동안, 공기의 떨림이 멈추고 마침내 발자국 소리가 어렴풋이 울렸다. 항상 그랬듯 확신에 찬 걸음걸이가 점점 분명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헉스는 숨을 깊게 들이마셔 보았다. 돌이켜보면 앞서 떠올린 것 외에 그 몸선의 움직임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체육관 안의 이상하리만치 뇌쇄적인 열기와 밭게 내뱉는 지친 숨결 소리 하나까지 아직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살아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후각이었다. 뭐라 단정짓기 어려운, 눈 깜짝할 새에 중독이라도 되어버릴 것만 같던 체취.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다. 땀냄새마냥 불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꽃향기마냥 간질거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맡을 수 없었지만 그가 홀로 훈련할 때나 섹스할 때만큼은 몸 주위로 향이 풍기다 못해 흘러넘쳤다. 오늘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니 아마 곱절은 진할 것이다. 헉스는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의 공기를 잡아내리라는 희망에 다시 한 번 들숨을 삼키었고, 그 순간 카일로가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을 열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짙푸른 녹안과 마주한 밤색 눈동자는 잠시 흔들리는 듯했지만 이내 평정을 갖추었다. 

"오겠다는 연락은 받은 적 없는데."

온몸에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카일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미건조한 어조로 보아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했다. 애초에 둘 사이에 약속과 준비라는 개념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늘 충동적이며 갑작스러웠고, 항상 예상 밖으로 벗어났다. 섹스가 하고싶을 땐 적절한 공간에서 적절한 시간에 마주치면 그만이었다.

"피곤한 하루였거든."

넌 안 그래? 락커 쪽으로 다가가는 카일로를 쫓아가 잡아세우며, 헉스가 속삭였다. 땀이 흥건한 어깻죽지를 만지작거리는 헉스의 맨손을 카일로는 의외라는 듯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았다면 비위생적이니 먼저 씻고 나오라고 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헉스는 카일로의 턱을 한 손으로 낚아채곤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그 이목구비를 잠시간 감상하다가, 곧 땀으로 젖은 채 양 볼처럼 상기되어 붉은 빛이 형형한 입술을 자신의 것으로 가볍게 빨아들였다. 짠 맛이 나는 게 거슬리긴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자신이 몇 분 전부터 다시 마주하기를 고대했던 바로 그 향이 폐에 가득 차다 못해 미각으로도 느껴졌다. 키스를 마치고 그가 만족스러운 날숨을 뱉어내자 카일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시선을 약간 위로 향하자, 항상 어딘지 애처로운 빛을 띠던 그 눈망울은 이미 반쯤 감긴 속눈썹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았다. 섹스를 해도 어차피 땀은 나니까, 샤워는 다 끝난 후에 하면 그만이다. 지금 헉스에게는 위생 관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었다.

몇 번의 입맞춤이 다시 오가고, 헉스가 카일로를 락커에 밀어붙이곤 거칠게 상의를 벗겨내어 드러난 쇄골에 잇자국을 남기고, 카일로가 헉스 쪽으로 흰 목덜미를 내어준 채 헉스의 허리춤을 끌어당기며 토해내던 더운 숨결이 야릇한 신음으로 뒤바뀔 쯤에야, 헉스는 카일로의 몸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자신의 어깨보다 약간 위쪽에 있는 카일로의 어깨를 왼손으로 누르자, 그는 순순히 다리에 힘을 풀고 탈의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카일로가 자신의 눈높이에 위치한 헉스의 벨트 버클을 끄르고 지퍼를 내리는 동안, 헉스는 왼손으론 카일로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오른손은 지지대 역할을 하도록 맞은편 락커에 가져다 대었다. 눈을 감자 금속의 시원한 냉기와 한껏 달아오른 상대방의 열기가 동시에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곧이어 천자락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굳은살이 빼곡히 배긴 카일로의 거친 손바닥이 헉스의 성기를 감싸쥐었다.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길래?"

반쯤 커진 상태인 헉스의 성기를 바라보며 비웃음과 함께 입을 열자마자 카일로의 뺨 위로 순식간에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닥치고 빨기나 해." 

자신을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리는 헉스를 카일로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쏘아보았지만 곧 시키는 대로 입술을 벌리고 헉스의 성기를 귀두부터 조금씩 삼키기 시작했다.

목젖 너머로 넘어가는 성기를 애써 감당하려고 숨을 헐떡이는 카일로를 응시하면서, 헉스는 입으로 뱉는 뜨거운 숨 사이사이로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지었다. 오랄 솜씨뿐 아니라 남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모양새며 평소 로드 렌의 모습에 견주어보면 상상도 못할 광경이었다. 그 큰 몸을 주저앉히곤 간간이 숨이 턱턱 막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데도 혀와 점막만을 사용해 성기를 열심히 애무하는 그의 상관. 문득 전장에서의 그 모습이 떠올랐다. 거대한 체구과 더불어 무기인 핏빛 라이트 세이버가 주는 위압감이란 적군에게든 아군에게든 똑같이 엄청났다. 그렇기에 헉스는, 카일로가 자신과 꼭 들어맞는 성적 취향을 가졌다는 게 더더욱 만족스러웠다. 피도 눈물도 없어보이는 독선가가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귀한 장면을 독차지할 수 있었기에. 비록 그것이 몇 시간 후면 끝나버릴 역할 놀음일 뿐이더라도.

헛구역질이 받쳐 욱 하는 소리를 참아가면서, 자신의 타액과 헉스의 프리컴이 섞여 입가에 질질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두면서까지 카일로는 계속해서 혀를 할짝거렸다. 오늘 오전만 해도 그를 말 그대로 내던지는 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자가 지금은 이런 꼴이라니. 척추를 타고 정수리 끝까지 올라오는 희열에 보답하듯, 헉스는 카일로의 사타구니를 구둣발로 지그시 밟았다. 참지 못해 헉 하고 터져나오는 슈프림 리더의 신음과, 구둣발 주위로 조금씩 적셔오는 게 훤히 보이는 바지, 그리고 안달난 듯이 양 손으로 자기 앞에 보이는 두 허벅지를 억세게 붙잡고 끌어당겨 붉은 음모에 얼굴을 파묻는 몰골까지, 헉스는 전부 다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잠시 후 헉스가 자신의 성기를 원래대로 물리자, 하얀 정액 타래가 카일로의 입으로부터 딸려나왔다. 카일로는 이를 익숙하게 입술로 끊어내곤 곧 자신의 입을 가득 메운 용액을 천천히 삼켜내기 시작했다. 꿀떡이며 바삐 움직이는 목울대를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려 주는 것은 헉스가 그에게 베푸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물론 카일로가 입 안을 깨끗이 비우고 입가를 쓸어내리는 즉시 자신이 뚫어져라 쳐다보던 바로 그 목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긴 했지만. 마치 그들 사이 관계에 배려가 들어설 자리는 더이상 없다는 듯이.

"뒤로 돌아서 기대. 니 락커 어떤 거야?"

카일로는 몸을 돌려 자세를 갖춘 후 고갯짓으로 바로 왼쪽을 가리켰다. 락커를 열고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옷가지들을 헤집자 헉스의 예상대로 윤활제 한 통이 나왔다. 그럼 그렇지. 발정난 개 같으니라고. 한 달에 일주일 정도는 유독 훈련 후 탈의실에서 평소보다 오래 머무는 것을 위치추적기로 봤을 때부터 짐작은 했었다. 만약 그가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아마 샤워실에서 제 손가락이든 라이트세이버든 뭔가를 뒤로 집어넣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중얼거리며, 헉스는 윤활제 뚜껑을 열고 검지와 중지를 적셨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진정 중인 카일로의 등 위로 여전히 땀방울이 근육을 타고 흘러내렸다. 헉스는 카일로가 싫었지만, 그래, 솔직히 저 몸은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저런 육체를 가졌으면서도 뒤로 박히지 않으면 제대로 가지도 못한다니. 물론 그 점이 꼴리는 거긴 하지만. 평소엔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으면서도, 이럴 때만큼은 자신에게 운 좋게 주어진 선물이나 다름없이 느껴진다고 헉스는 새삼 생각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바지를 끄르고 검지와 중지를 동시에 밀어넣자, 앞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숨소리가 턱 하고 막혔다. 예상보다 조금 뻑뻑했지만 헉스는 굳이 손가락 하나를 다시 거두는 수고따위는 들이지 않았다. 카일로는 항상 벼랑 끝까지 몰아세워지는 게 습관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전장에서든, 침대에서든. 그저 자신이 원해서 그러는 건지, 혹은 그렇게 다뤄지지 않으면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그러는 건지는 확실치 않았다. 손을 빼 약지를 추가하자 괴로움에 울부짖으면서도, 세 손가락으로 전립선을 압박할 때마다 크게 휘청이며 끙끙대는 짐승. 헉스는 다시 한 번 평상시와 지금의 카일로를 번갈아가며 떠올렸다. 정말 이렇게까지 다를 수가 있다니. 섹스할 때는 이상하리만치 고통에 순종하는 까닭은, 어쩌면 단순히 그의 마조히스트적 취향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아픔과 수치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욕지기 한 번 내뱉지 않고 감내하는 이유는 무얼까.

손가락들에 맞닿는 내벽이 느슨해지기도 전에 헉스는 거칠게 손을 거두고 곧바로 자신의 성기를 가져다 대었다. 오랄을 끝낸 후로 아무런 직접적인 마찰은 없었지만 시청각적인 자극만으로도 다시금 열기가 올라오기엔 충분했다. 윤활제를 뿌리기 위해 성기를 입구에 맞추지 않고 잠시 느릿하게 위아래로 비비자, 카일로의 허벅지가 그에 응답하듯 부르르 떨렸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라면 원하는 게 뭔지 직접 네 입으로 빌어보라며 얄궂게 비웃었겠지만 오늘은 왜인지 별로 내키지 않았다. 짜증날 정도로 생각이 많았다. 잡다한 생각따윈 치워두고 섹스에나 집중해야겠다고 결정한 헉스는, 미끈한 윤활제를 뒤집어 쓴 제 성기를 카일로 안으로 한번에 밀어넣었다.

으윽. 하아. 응, 읏, 흣, 끅. 카일로의 몸이 추삽질을 시작한 헉스를 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앞뒤로 흔들렸고, 허파에서 입술 틈새로 숨가쁘게 터져나오는 외설적인 신음은 락커가 삐걱대는 소리와 불협화음을 이뤘다. 아무런 언어적 표현도 없이, 오직 본능이 가득한 소리 그리고 두 사람의 뒤얽힌 체취만이 텅 빈 탈의실 안 전체에 어지럽게 울려퍼졌다. 헉스는 자꾸만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면서도, 남는 손으로는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계속해서 휘청대는 카일로의 두꺼운 허리를 애써 잡아세웠다. 오늘따라 유난히 민감한 듯했다. 손으로 만져주지 않아도 카일로의 성기가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꼿꼿이 서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락커에 김이 서리도록 부어내는 음탕한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헉스가 자신의 상체를 굽히자, 카일로의 입에서 신음 사이사이로 뭉개진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 세게."

"뭐?"

"더, 윽, 흐윽, 세게, 박으라고."

더 세게 해달라니,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연거푸 지르다보니 카일로의 목소리는 완전히 쉬어서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다리에도 힘이 다 풀려 주저앉기 일보직전인 주제에 더 거칠게 박아달라는 꼴은 영락없는 자학에의 예속이 아닌가. 그래도, 똑같은 속도로 박아대는 그에게 앞뒤로 정신없이 흔들리는 고개를 간신히 돌려 보인 얼굴이, 표정은 매서우면서도 실상 눈 속에는 간절함이 담긴 게 참 애달프고 기특해서, 헉스는 부탁대로 조금 더 강도를 높였다. 두툼한 골반을 단단히 쥐고 박아대자 이제는 울음이 끓는 소리가 카일로의 성대로부터 그의 손바닥까지 울려왔다. 얼마 가지 않아서 카일로의 허리가 눈에 띄게 휘었다. 우윳빛 액체가 바닥으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카일로의 허벅지 안쪽으로 흘러내리는 정액을 보며, 헉스는 여전히 박히는 중이라 공중에서 정처없이 사정하고 있을 성기를 상상했다. 

헉스 자신도 한계에 다다라 간다고 느낄 때쯤 카일로는 이제 비명을 지를 기력조차 없어 흐느끼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만하라는 말은 실수로라도 뱉는 법이 없었다. 카일로는 왜 이런 관계를 자처했을까. 평범한 쾌락도 아닌, 고통과 치욕으로 얼룩진 섹스를 자꾸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겉으로는 자신처럼 성적인 취향으로 포장하고는 있으나 그 이면에는 아마 속죄의 의미가 담겨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헉스는 생각했다. 속죄를 엉뚱한 사람에게서 영 틀린 방법으로 찾는 게 웃기기는 하다만. 카일로가 정확히 어떤 생을 거쳐왔는지는 몰라도, 헉스는 그가 가진 한이 자신의 것과 아주 유사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다만 그 한을 해결하려는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왜 카일로는 자신의 한이 낳은 결과로 이리도 고통받을까? 헉스 자신은 그 한이 낳은 결과로 이렇게 서 있는데.

몇번의 피스톤질을 마지막으로 마침내 헉스가 사정하자, 카일로는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에선지 뒤쪽으로 퍼져오는 따듯한 감각을 느끼며 잠시간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사정의 여파로 역시 잠시간 숨을 고르던 헉스가 깊숙이 박혀있던 성기를 그에게서 완전히 뽑아냈을 때였다. 카일로는 상체를 완전히 일으키고 락커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충혈된 눈 아래 완연한 눈물자국이 조명 불빛에 반짝였다. 헉스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바지를 끌어올리고 천천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카일로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바닥에 떨어진 정액과 같은 흔적들을 완전히 정리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선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샤워실로 향하는 카일로의 뒷모습을 헉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운명 같은 건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포스라는 힘과 스카이워커의 혈육이 눈 앞에 저렇게 실존하는 가운데, 운명이라고 과연 세상에 정말 없겠느냐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 자신의 운명보다도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가는 검은 머리 남자의 운명이 궁금했다. 우주의 모든 일이 필연이라고 믿진 않지만, 방금 전까지 그의 앞에서 고개 숙여 신음하던 짐승에 관해서라면 예외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예외가, 헉스가 보기엔 저주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베이더의 피 속에 흐르는 숙명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는 한편으로는 카일로에게 측은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헉스는 곧바로 자신의 잡념을 지워버렸다. 감정적 유대가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 그들의 관계는 파멸에 이를 게 틀림없었다. 카일로의 형체가 샤워실 문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그는 탈의실 문을 열고 복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여러모로 피곤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