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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kaia

Summary:

내 아버지의 집에는 수평선 위 밤의 문을 짜 넣은 커다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Notes:

Commissioned work; for sithclare.

Chapter Text

고향을 떠나 외해(外海) 엑카이아로 향하기 전, 잉귀온은 날 망명자 클럽에 추천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티리온, 특히 민돈 엘달리에바 쪽의 클럽들에 비할 바는 아닐지언정 망명자 클럽은 엑카이아는 물론 그 부근을 통틀어 가장 저명한 곳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잉귀온의 약속에 곧이곧대로 신뢰를 걸었다. 적어도 팔 할은 그가 잉궤의 아들인 까닭이었다. 과연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나는 엑카이아에 도달한 다음 날 곧바로 클럽의 위원회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초청장의 수신인 자리에 쓰인 이름에 코웃음을 치고서 — 잉귀온은 내 아버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언제나 나를 아라카노 잉골도, 라고 부르고는 했다 — 나는 면접 자리에 걸치고 나갈 만한 옷을 찾아 삼십 분쯤 짐가방을 뒤졌다. 어쨌든 이것은 나보다는 잉귀온의 평판에 더 영향을 미칠 문제였고, 내겐 그에게 배은망덕한 어린애로 기억될 마음까진 없었다. 후에 알게 될 일이었지만, 그것은 꽤 현명한 결정이었던 것으로 판가름 났다.

면접의 결과는 어차피 다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신사들의 클럽이란 것은 제2의 집이나 마찬가지로, 둘 이상의 클럽에 소속된다는 것은 본국에서는 금기에 가까웠으나 엑카이아에서라면 오히려 권장되었으니까. 엑카이아는 사람들이 영영 머물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라 그저 잠시 지내다 떠나는 곳이었다. 오죽했으면 ‘외해의 일은 외해에 남는다’라는 격언까지 있었겠는가?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세상을 안전히 맛보기 위해, 따분한 도시에 질린 학자들이 보다 힘에 넘치는 글을 쓰기 위해, 혹은 어린아이 딸린 귀부인들이 일상에 파도를 더하기 위해 찾아오는 그곳에서 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자유의 향기에 한껏 취해 있었다.

형식적인 질문을 몇 듣고, 내가 과연 잉귀온의 사촌동생이자 전도 유망한 청년이 맞음을 확인한 다음 위원회의 신사들은 나를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나를 환영하는 그 흐리멍덩한 눈동자들을 마주하려니 왜인지 헛웃음이 났다. 그래도 좋았다. 무엇이 그리 기대되어 잔뜩 신이 났냐는 물음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범하게도 이렇게 답할 정도로.

“태양이 잠들러 온다지 않습니까, 이곳으로?”

나는 머잖아 무언가 짜릿한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희망이라 해도 좋았고 어리석은 기대라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가 비로소 외해에 발을 들였다는 점이었으니.

내 믿음이 보답받은 것은 클럽 정문의 계단 아래서였다.

그 무렵 막 엑카이아에 도달한 젊은이들은 세를 얻거나 집을 구할 형편이 되기 전까지는 클럽에 머물며 숙식을 해결하고는 했는데, 나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마부가 마차에서 내 짐을 내리는 사이 나는 발뒤꿈치로 계단 맨 아랫단을 툭툭 차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티리온의 혼잡한 질서나 발마르의 평온과는 질적으로 다른 활기가 도시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라며 나는 내심 이방인의 오만함이 한가득 담긴 평가를 내리려던 참이었다. 타지에 발을 들인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기에 떠올릴 수 있었을 생각이었다. 그때 저만치서부터 길 가운데를 따라 한 신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도시며 활기에 관한 모든 상념은 내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지고 말았다.

그저 스치듯 미끄러져야 마땅했을 내 시선을 붙든 것은 무엇보다 그의 걸음걸이였다. 멋으로 든 것이 분명한 단장이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자갈 깔린 길 위로 그림자를 그렸다. 광을 낸 구두 위로 드러난 발목은 고동색 모직 양말에 감겨 있었는데, 바지 밑단이 복사뼈를 덮을락 말락 흔들리는 것에 이상하게 목이 탔다. 그리고 쭉 뻗은 다리를 따라 올라가면 비로소 사냥개처럼 날렵한 골반과 허리가 눈에 들어오고…….

몸에 꼭 맞게 재단한 재킷의 봉제선은 옆구리의 유려한 곡률을 부각했다. 당당히 펴진 가슴을 거슬러 올라가면 크라바트 위로 날카롭다시피 강마른 턱이, 가는 붓으로 칠해 넣은 듯한 붉은 입술이 선명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붉은 입술이 움직여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인걸.”

자로 잰 듯 떨어지는 티리온 억양의 퀘냐였다. 단언컨대 단 한 마디만으로 출생의 고귀함을 증명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였을 것이다. 그는 먹이의 위치를 가늠하려는 올빼미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덧붙여 물었다.

“잉골도 군?”

“아, 아라카노입니다.”

더듬거리고서 나는 서둘러 오른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당황했거든 아예 길거리의 거지 소년처럼 바지에 손바닥을 비벼 닦는 수치를 보였을지도 몰랐다. 장갑을 끼고 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땀에 찬 손바닥을 연한 송아지 가죽으로 덮을 수 있었던 것이. 남자는 내 손을 힘차게 맞잡고서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오늘 도착했다는 소문을 들었지. 금발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 예, 아버지가 놀도르 분이십니다.”

“자네를 절반만 싫어해도 된다니 기쁘군.”

한순간 남자의 손아귀에 실린 힘은 예상외로 강해서,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남자의 싱글거리는 낯에 그대로 쏘아붙이고 말았다.

“전부 좋아하실 수 있게끔 노력하죠.”

내 뺨이 달아오르든 말든 남자는 하,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흥미와 즐거움이 뒤섞인 소리였다. 나는 열기가 내 뺨을 지나 귓가와 목덜미로 번지는 것을 느꼈다. 신이시여, 맙소사. 초면의 신사 앞에서 무안을 당한 데뷔탕트처럼 굴다니.

남자는 악수를 풀더니 내 어깨를 한 번, 두 번 두드렸다.

“페아나로. 나는 페아나로일세. 자네 노력이 과연 결실을 맺을지, 어디 두고 보자고.”

 

 

페아나로는 퍽 자연스럽게 나를 자신의 날개 아래로 거두어들였다.

그는 나보다 열세 살이 많았고 슬하에 두 어린 아들이 있었다. 억양이며 행동거지에서 드러나는 대로 티리온 출신이었으며 어느 저명한 야금학자의 사위라 했다. 온 세상을 발 아래 둔 듯 오만하면서도 의외의 분야에서는 겸허함을 보였다. 그가 루밀의 아티클을 읽고 유레카를 외치는 것을 보며 나는 그가 뼛속까지 진리의 탐구자임을 알았다. 그래 봤자 나와는 먼 세상의 이야기였다. 나는 오래된 종이 냄새나 풍기는 학문에는 재능이 없었으므로.

대신 우리는 사사건건 아만의 문화와 발마르에 한창 유행한다는 희극과 아라타르의 외교적 실책 따위를 놓고 대립했다. 그는 좀처럼 의견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던지라 언쟁은 대개 나의 패배로 끝났으나 이따금 그는 내가 내놓은 말에 몇 초씩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면 그의 잿빛 두 눈 저편에서 일렁거리던 불꽃은 수그러들기는커녕 도리어 단단하게 붙들려 한층 더 강한 열기로 타오르는 듯 보였고, 시가 연기 자욱한 응접실에서 그 모습을 관찰하며 나는 그의 홍채에 얼룩덜룩한 주홍색 균열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오래가는 법이 없었다. 손가락 가운뎃마디로 — 그의 길고 흰 손에는 펜대나 당구채쯤으로는 얻지 못할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 얇은 아랫입술을 핏기가 죄 빠지도록 누르다가도, 그는 곧 입을 열어 그의 지성과 혀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타박에 매료되었다.

“하여튼 특이해.”

페아나로는 곧잘 내게 말하고는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유독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나는 그를 누그러지게끔 하는 데서 묘한 자부심을 얻고는 했다. 그렇게 길드는 것조차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유일하게 내가 이해하지 못한 점은 바냐르를 향한 그의 이유 모를 적개심이었다. 그는 내 입에서 이따금 외가 쪽 말버릇이 새어나올 때마다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기실 내 실수들이란 언어학자가 아니고서는 알아채지도 못했을 종류가 대부분이었던지라, 페아노르가 아무리 인상을 구긴대도 나로서는 사과하기가 멋쩍어 눈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바냐르가 그리 싫다면 왜 잉귀온의 사촌을 가까이하냐 묻고 싶었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굳이 짐작하자면, 그래도, 그의 천성은 본디 까다로운 도전을 즐기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할 뿐이다. 거저 주어지는 것들을 그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그의 손을 탄 것들에 대한 자부심은 내 질투를 살 만큼 뚜렷했고.

클럽에 머문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페아나로는 내게 차라리 자신의 집에 묵지 않겠냐는 제안을 건넸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인 채였다. 나는 그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그리고 그와 한집에서 지내게 될 경우 어쩔 수 없이 보고 또 보이게 될 사적인 면모에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껴 제안을 거절하고 말았다……. 아니, 실은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외부의 모든 걱정과 압력을 벗어 던져도 좋은 클럽에서 페아나로가 드러내는 모습과, 그의 가족이 함께인 진짜 집에서의 모습 사이 불가피하게 존재할 차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어린아이의 사과처럼 붉은 뺨에 입을 맞춘다든지 아내의 둥근 어깨에 한 손을 얹는 페아나로를 상상할 수 없었다. 시가를 꼬나문 채 냉소적으로 입꼬리를 비트는 남자가, 그 남자만이 곧 페아나로라고 믿었다.

뜻밖에도 페아나로는 내 거절에 그리 마음을 상하지 않은 듯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종종 나를 지목해 의견을 묻거나 일부러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었으며 공원에 나가 함께 걷자는 말로 끌어내고는 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집을 장소로 삼은 초대는 한사코 거절했으나 그가 공통된 ‘친구’의 파티에 나타난다는 식의 소문에는 늘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운이 좋다면 나는 그와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 이마를 맞댄 채 모여든 사람들을 함께 비웃을 수도 있었고 또 그의 날숨에 묻어나는 코냑 향을 느낄 수도 있었다.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은 저녁에라도 만취한 듯 머리가 아찔해지는 경험이었다.

그의 특별한 관심은 마치 내가 분에 넘치게도 그에게 걸맞는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의 행동이 어리석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 잔을 채워 달라 외치는 주정뱅이처럼, 토할 것 같은 심정이 될 때까지 그의 곁에 버텨 서고 말았다.

 

 

어느 저녁, 페아나로는 나를 클럽 근처 강가로 불러냈다. 내가 엑카이아의 선착장에 발을 디딘 지도 석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나 계절은 한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밤은 산들바람 하나 없이 습했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우리는 강 옆 거리를 거닐었다. 몇 걸음 안 가 페아나로는 재킷을 벗어 한쪽 팔에 걸쳐 들었고 얼마 뒤에는 셔츠 단추마저 두어 개 풀어 내렸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의 쇄골에서 눈길을 떨쳐내야만 했다. 애먼 크라바트를 잡아당기고 있으려니 페아나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내기에 불편한 점은 없고?”

그는 이따금 뜻밖의 배려심을 보였다. 정말로 내 스승, 혹은 친척 어른이라도 된 듯한 태도였다. 이상하게 응어리 진 목을 가다듬은 다음 나는 애써 대수롭잖게 답했다.

“덕분에요.”

빈말은 아니었던 것이, 페아나로와의 친분은 나 같은 물정 모르는 젊은이를 낯선 이들의 악의로부터 비호해 주는 효과까지 지녔다. 페아나로는 사정을 안다는 식으로 웃고는 말했다.

“가족이 그립지는 않고?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물은 적이 없군. 그래, 형제자매가 있나?”

“웬일로 그리 평범한 걸 물으십니다.”

“내가 자넬 질리게 했나? 아라카노.”

“그럴 리가요.”

내가 그에게 질릴 일은 천 년이 지나도 없으리라 단언하는 대신, 나는 단순히 먼젓번 질문에 대답했다.

“셋 있습니다. 누님 한 분, 그리고 여동생과 남동생 하나씩이요.”

“부모님께서 운이 좋으셨군. 난 사내애만 둘이라.”

변명하자면 그건 내 아버지의 벗들이, 특히 핀디스의 일을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나와 형제들에게 종종 하는 소리와 놀라울 만큼 똑 닮아 있어서, 나는 저도 모르게 입에 익은 모범 답안을 그대로 내놓아 버리고 말았다. 아차 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애들에게는 그편이 나을지 모르죠. 전 제 누이들과 그리 친하지 않다 보니……. 저보다 제 약혼녀가 더 교류가 잦을 지경인 것을요.”

잠시 정적이 흐른 뒤에야 나는 묘한 기류를 눈치채고 내가 방금 뱉은 말을 되짚었다. 너무 섣부른 말이었을까, 페아나로가 위로를 바란 게 아니었을까, 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했을까 — 당황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사이 페아나로가 한발 앞서 말했다. 이제껏 그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목 메인 음성으로.

“약혼녀가 있었나?”

후덥지근한 공기가 문득 내 숨을 막히게 했다. 허파에 물이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아나로는 읽어내기 어려운 표정을 짓더니 재차 물었다.

“결혼할 거고?”

“예.”

“어울리는 집안의 숙녀분이겠지?”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먼저 아나이레의 라벤더 빛 드레스를 떠올리고는, 그 부드러운 색이 눈앞의 이 남자에게 얼마나 어울리지 않을지를 생각했다. 내가 아나이레와 아나이레의 가문에 관한 형식적인 이야기를 몇 마디 늘어놓기가 무섭게 페아나로는 내 말을 끊었다.

“아라카노, 그 아가씨를 사랑하나?”

사랑?

나는 사랑을 몰랐다. 말마따나 아나이레는 훌륭한 배경을 가진 숙녀였다. 네 가지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했고 음률에 뛰어났으며 무엇보다 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에 밝았다. 그리고 아나이레는 아름다웠고, 나는 젊었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내게 있어 퍽 중요한 문제였다. 아나이레에게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차남일지언정 어머니의 장자였고 내 앞으로 오게 될 재산이며 명예는 결코 적지 않았다. 나와 아나이레는 서로를 이해했다. 결혼한다면, 이해에 존중이 더해지지 못하리라 여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라고, 내 안의 어느 수줍은 목소리가 채근했다. 하지만 아름답기로 치자면 눈앞의 이 남자가 배는 더하지 않은가. 그의 지력은 발마르의 모든 학자들을 능가하며 교양은 살롱의 여인들을 수월히 뛰어넘는데. 그의 눈은 채도 낮은 사파이어처럼 빛나며 피부는 깎은 상아처럼 무결하고 뼈대는 고대의 신상이나 다름없다. 그가 호흡할 때의 생동감은 범람하는 겔리온의 강물인 양 흘러넘친다……. 사랑이라면, 마땅히 이 사람을 향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운 바람이 불어와 검은 머리카락을 흩뜨리고 밤의 어둠은 입술의 붉은 기에 더해질 뿐이다. 나는 초여름의 문턱에서 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페아나로를 직시했다. 발밑이 기우는 것만 같았다. 내 인생의 모든 분과 초가 이곳을 향해 내리막으로 내달려 온 것이었음을, 나를 구성하는 모든 원자가 아우성치며 주장했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언가 말하려 준비했다.

그리고 페아나로가 나의 턱을 감싸 쥐었다.

입맞춤은 짧았다. 우애의 키스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가벼웠다. 그는 나의 날숨을 빼앗았고 나는 기꺼이 도난을 용납했다. 기실 누가 이 사람을 숭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애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의 입술은 벨벳처럼 부드럽고 뺨에 닿을 듯 가까운 온기는 영혼에 그을음을 남긴다. 누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타는 듯한 목소리가 묻는다. 그 아가씨를 사랑하나? 아라카노.

그건 내 이름이 아니다.

나는 손을 들었다. 무른 귓가를 손바닥으로 덮고 비단실 같은 흑발에 손가락을 엮었다. 고개를 기울였을 때 나는 마치 신을 유혹하는 님프 혹은 정령의 손목을 휘어잡는 영웅이 된 기분에 휩싸여 입을 벌렸고 페아나로는 내게 응답했다. 우리 둘 다 육신의 욕구에 있어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 갈망의 실체를 알았다.

“당신만큼은.”

대답하는 음성이 낯설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머리카락이 당겨졌는지 페아나로가 작게 신음했다. 내 입술에 대고. 저릿한 느낌이 척추를 따라 퍼졌다.

“당신만큼은 아닙니다.”

최초이자 최후의 사랑. 더운 열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휘청이며 그에게로 무너졌다. 필연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