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ons

Work Header

Rating:
Archive Warning:
Category:
Fandom:
Relationship:
Additional Tags:
Language:
한국어
Stats:
Published:
2024-07-28
Words:
4,841
Chapters:
1/1
Kudos:
14
Bookmarks:
2
Hits:
245

[번역] 시간

Summary:

원작 책 <두 개의 탑> 중. 전투를 앞두고, 김리는 죽음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Notes:

cimorene 님의 Time을 번역한 글입니다.

A translation of Time by cimorene

Work Text:

요정은 전투가 임박했음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고, 김리는 확신했다. 지금 당장은 난간에 기대어 있을 뿐 망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눈을 가늘게 뜰 때마다 요정의 콧구멍은 움찔댔고, 시선은 점차 내면 깊숙히 가라앉아 갔다.

그 눈에는 아마 몇 리 밖에서 다가오는 적군이 보일 것이었다. 함께 기다리는 동안 내내 쳐다볼 셈은 아니었으나, 김리는 그 섬세하고 뾰족한 귀끝이 바람이 아닌 다른 이유로 쫑긋대고 파르르 떠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다른 발로 체중을 옮기고 레골라스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잘근댔다. 그는 투구부터 골까지 뒤흔드는 짐승의 등에 올라 요정의 깡마른 상반신에 매달린 채 흔들대며 며칠이고 달리는 데에는 질렸다고 말한 바 있었다. 김리는 전투가 임박했음을 뼛속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알았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센가드의 군대가 몰려올수록 그 사실은 그의 피부를 스멀스멀 기어오르며 뜨끔뜨끔하게 찔러 댔다. 전투를 앞에 두고 이렇게 초조한 적은 수십 년 만에 처음이었는데, 초조함이 조바심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수염 속으로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도끼 자루에 손을 올려 단단히 잡았다.

"무엇 때문에 그래, 김리?" 요정이 자신에게 신경을 쓰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김리는 곧바로 올려다보았다.

"기다림 때문에." 그가 중얼거렸다. "전투를 앞두고 이렇게나 초조한 적은 오래도록 없었는데. 오르크든 트롤이든, 아니면 숫돌이라도, 뭐든 도끼를 갖다댈 만한 걸 달란 말야. 이런 건 난쟁이에겐 맞지 않는다고..." '이런' 게 뭐지? 그는 알지 못했다. 높은 성벽 꼭대기에 서서, 저 멀리 단단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 그러나 그의 발밑에 깔린 돌은 충분히 단단해 보였다. "돌아버리기 딱 좋단 말이지." 그는 갑작스레 자신을 향한 레골라스의 탐색하는 시선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어깨를 들썩이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검푸른 두 눈이 곧바로 그에게 꽂히더니, 갸름하고 뾰족한 턱이 아래로 기울었다. "과연." 그가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입술이 미소인 듯 어렴풋이 휘었다. 십 분도 안 되어 김리는 레골라스의 질문을 의식 밖으로 밀어냈다. 레골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김리는 자신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곧바로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래?"

"죽음이." 김리가 속삭였다. "전에는 이렇게 신경쓰인 적이 없었어. 죽음을 목전에 둔 마당에 생각할 시간 따위 아예 없었더라면 나았으련만."

김리는 입술에 힘을 주었으나, 자신의 가슴속에서 부풀어오르는 불확실한 마음이 현명하지 못한 말을 자아내기 전에, 그리고 요정 역시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레골라스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뒤이은 고독에 가까운 침묵 ― 레골라스, 김리, 죽음의 그림자, 그리고 그들이 절대 완전히 이해하지도 입 밖에 내지도 못할 말들에 대하여 ― 속으로, 레골라스의 말이 마침내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이게 난쟁이다운 전투라면 좋겠군, 김리." 그리고 그는 아까와 똑같이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내려 김리의 눈에 맞추었다. 

저 눈빛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김리는 목덜미가 더워지는 것을 느끼고 잠시 눈을 감았다. 잠깐. 아주 잠깐 동안만. 이제 됐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친구." 마침내 레골라스가 말했다. 마치 김리가 하지도 않은 질문, 또는 그의 목구멍에 걸려 있는 무뚝뚝한 부정의 말에 대답하듯이.

김리는 자신이 한 질문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질문이 무엇이었든 상관없었다. 이미 묻고 말았으므로. 김리는 시선을 들어 레골라스를 고집스럽게 마주 응시했다. 그의 발밑에 깔린 견고한 돌바닥에는 동요가 없었고, 그의 몸 역시 흔들리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상상이며 요정의 망할 눈이 거는 최면일 뿐이었다. "자네는 죽지 않지, 레골라스. 하지만 오직 창과 검과 화살이 닿지 않을 때에만 그래. 전투에서는 나와 마찬가지로 불사가 아니야."

"내 기량의 보호가 더해지지 않는다면 그렇겠지, 난쟁이. 내 화살은 과녁을 틀림없이 맞히고..."

김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으르렁대고 있었으나 분노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그의 뭉툭한 손가락이 친우의 부드러운 소맷단을 단단히 감아쥐었다. "하지만 자네 목은." 그가 말했다. "귀부인의 것처럼 희어서 어떤 화살에든 표적이 될 것이고, 자넨 갑옷도 입지 않았지. 죽을 수도 있어."

레골라스는 제 기량을 비방하는 말에 모욕을 받아, 자신이 살아 온 이천 년 세월을 차가운 망토처럼 두르고는 유연한 등줄기를 꼿꼿하게 세웠다. "난 죽지 않아." 김리가 자신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을 레골라스 역시 김리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더라면, 화가 났을지는 몰라도 그리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쩌면 자네도, 그리고 나도 죽을 수 있어. 여기 불쌍한 친구들만큼 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 로한의 사람들은 자네 말대로 적군과 성 사이에서 살점으로 된 방벽 신세가 되어 죽을지 모르니 ― 하지만 운명에는 자비가 없어, 레골라스. 그리고 자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지. 오늘이 아니라면 언제가 되겠나? 바랏두르 기슭에서? 나한테 마치 자네가..." 김리의 목소리는 낮고 험악해졌다. "희미하기 짝이 없는 희망 이상을 갖고 있는 척하지 마."

레골라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제 그의 눈빛은, 김리의 생각이 표류하는 모양을 감지한 듯이, 혹은 김리의 눈동자의 움직임을 ― 좀 더 정확히는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레골라스의 백금 같은 머리칼이며 빛나는 뺨과 목덜미의 금지된 별빛에 이끌리는 모습을 포착한 듯이 예리해져 있었다. "나는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

김리는 매몰차게 웃었다. "그렇다면 자네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을 경계하게." 레골라스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얼굴을 찡그린 채 말이 없었고, 시선은 부끄러움에 못박혀 있었다. 김리는 축축하고 미끄럽고 좁다란 빙하 틈에서 갈 곳 모른 채 겁에 질린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길을 잃고, 어찌할 바 모르는. 붙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레골라스는 놀라는 기색 없이,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처럼 이끌려 다가왔다. 둘의 눈이 같은 높이에 있었다. 바람이 레골라스의 머리칼을 지분댔다. "나는 죽지 않겠어." 김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레골라스, 나는 우리가 이런 상태인 채로는 죽지 않겠어. 우리 사이에 이런 걸 남겨둔 채로는, 여기에 맞는 말을 찾지 못한 채로는. 자네도 내 기분을 알잖아."

이제 당황한 것은 요정이었다. "아냐." 그는 날카롭게 말하며 몸을 홱 당겨 김리의 단단하기 짝이 없는 손아귀에서 손쉽게도 빠져나갔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김리의 목구멍과 가슴이 씁쓸히 조여들었다. "내가 죽는다면."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땐 내 말을 들은 뒤일 테지, 요정. 자네 생각에 적절하든 말든 알 바 아냐!" 그는 다시 팔을 뻗어 친우의 아래팔을 움켜쥐었다. 상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마주 노려보았으나, 정말 떠날 마음이 있었다면 애초에 그가 붙잡게 두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레골라스의 몸에서 오는 열기가 거의 느껴질 만큼 몸을 가까이 붙였다. 레골라스는 나무처럼 미동이 없었다.

"자네도 알게 될 거야. 레골라스, 내 마음은, 무거워. 아라고른과 호빗과 우리의 모든 친구들을 위해 벌어지는, 지독한 전투와, 죽음과, 죄책감 때문에. 자네의 아주 가벼운 요정의 무게 때문에, 나를 미치게 하는 자네 요정의..." 말을 계속하면 목소리가 갈라질 것 같았다.

"김리!" 그는 절박하게, 김리의 말소리를 덮으며 말했다. "그래서는 안 돼!"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이런 것들은... 입 밖으로 나와서는 안 돼! 지금은 전시戰時야! 자네 비밀은 가슴 속에 간직하게! 이 흉벽이 그 말을 들어서는 안 돼." 그 목소리의 냉기에 손을 덴 김리는 충격을 받은 채 그를 놓아주고 돌아섰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김리는 말했으나, 세 걸음도 채 못 가 늘씬한 손가락이 뒤에서 그의 손을 으스러뜨리듯 붙잡았다. 죽음, 공포, 수치... 그들 위의 하늘은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였고 해는 하늘에 온기를 줄 기미가 없었다. "이것 놔, 레골라스." 그러면서도 김리는 다시 돌아섰고, 그들의 눈동자가 마주친 순간 그는 벼락을 맞은 듯한 전율을 느꼈다. 추위는 사라졌고, 레골라스는 오히려 자신보다도 확신이 없어 보였다.

그는 김리의 손을 붙잡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도 마저 붙잡았다. 이제 바보처럼 포개어진 둘의 손 네 개는 찬 바람 속에서도 뜨거웠다. "김리, 내가 청하는 것은 오로지 내 마음을 알아낼 시간을 달라는 것뿐이야."

마치 아직 모르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지만, 요정이여." 그가 서늘하게 대꾸했다. "자네는 막대한 것을 청하고 있다네. 우리에게 없는 건 시간뿐이거든."

 


 

이른 아침 그들은 헬름 협곡 아래의 무기고를 찾았다. 그들의 무기는 아직 오르크의 피로 물든 채였다. "온몸이 오물투성이군." 레골라스가 자신을 돌아보며 말했으나,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다.

"나만큼이나 무법자 같은 모습이구먼, 요정." 김리가 껄껄 웃었다. "자네나 나나 밤에 숲에서 홀로 걷다 마주치고 싶지는 않을 꼴이야."

"무기고에 아이들이 없어서 다행이야." 레골라스가 엄숙하게 말했다. "내 야만인 같은 흙투성이 얼굴을 보고 자네를 향해 도망쳤다가 그 머리에 비뚜름하게 둘러진 붕대에 걸리고 말 테니까." 김리는 붕대 가장자리 부근의 머리칼에 레골라스의 가벼운 손길이 닿는 것을 느꼈다. "두개골이 갈라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나, 난쟁이? 그 아래에는 어떤 부상을 입었지? 왜 자네의 투구와, 도끼와, 단단한 머리조차도 자네를 지키지 못했어?"

김리는 그 놀림에 답하는 대신 헝클어져 엉겨붙은 머리칼을 뚫고 머리에 와닿는 시원한 냉기, 붕대 위를 쓸며 머무는 손길에 대답했다. "그냥 좀 긁힌 거야." 그가 고개를 틀어 올려다보자 레골라스의 손이 새처럼 재빨리 멀어졌고, 둘은 서로에게 미소지었다.

"여기가 무기고인가?" 레골라스가 말했다.

김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거운 나무문을 옆으로 밀었다. 헬름 협곡은 전체가 산비탈을 다양한 완성도와 다양한 숙련도로 깎아내어 만들어진 곳이었다. 아치형 천장에 매달린 뭉툭한 종유석 기둥은 인간이 로한에 오기 전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벽의 부분부분과 바닥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어떤 곳에는 거친 바위 모서리를 따라 광맥이 드러났으며, 벽을 탐색하는 손끝에 습기가 스며나왔다. 구석구석은 거미줄로 어두침침했으나 텅 비어 있었다. 바닥 한가운데는 여러 모양의 발자국 사이로 먼지가 쌓여 희여멀건했으며, 문 근처에 피로 더럽혀진 채 쌓인 무더기를 제외하면 방어구랄 것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수리가 필요해 보였다. 핏자국은 새것이었다.

그들은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간밤에 많은 피가 흘렀어." 요정이 말하며 김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엉망이 된 머리칼보다는 손을 올리기 좋은 자리였다.

"그래." 김리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래도록 전사자의 피로 어지럽혀지지 않은 아름다운 동굴이었고." 그러나 그는 무릎을 꿇고 흰 먼지가 그의 손부터 팔꿈치까지를 뒤덮고 무릎 주위로 피어오를 때까지, 그리고 검고 붉은 핏자국이 손마디와 손끝을 물들일 때까지 불운한 방어구 더미를 살펴보았다. 대부분은 이미 쓸모가 없었다. 오르크의 칼에 찢긴 가죽 쪼가리, 꿰뚫리고 휘어진 미늘 갑옷, 부서져 바닥에 흩어진 사슬. 김리는 금속을 긁어모았다. 사슬은 새롭게, 그리고 튼튼하게 벼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장비 대부분은 이미 저마다의 마지막 전투를 치른 뒤였다.

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는 레골라스의 목소리가 살짝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의 동료가 할 일을 내팽개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돌 좀 봐, 김리." 그는 꿈꾸듯이 말했다. "봐, 거의 한 송이 꽃과도 같군."

김리는 고개를 들었다. "벽 앞에 서서 없는 꽃만 보고 있을 거야, 아니면 날 도와 우리 할 일을 마칠 테야?" 그가 으르렁거렸다. 레골라스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 시선이 꽂힌 곳을 확인하려면 일어나서 레골라스의 곁으로 가야만 했다. 레골라스는 수정 결정이 거친 벽의 퇴적층을 뚫고 나와 송이를 이룬 곳을 가리켰다. 떨어지는 물방울에서 만들어진 얇고 단단한 석질의 막이었다.

김리는 곰곰히 생각했다. "어둠 때문에 눈이 피로해진 거야, 친구. 저건 수정이라고. 어찌 꽃 비슷하게 보일 수는 있겠군."

하지만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레골라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손끝은 돌로 된 잿빛 집을 비집고 나온 수정의 겉표면을 맴돌고 있었다. 수정은 어설프게 생긴 꽃송이처럼 보였다. "난쟁이의 꽃 같군."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돌과 보석으로 이루어진, 깎아 다듬었다기에는 너무나 거칠지만 어떤 조각가도 더 아름답게 만들지 못할. 들여다볼수록 어떤 꽃을 나타낸 것인지 정확히 알 것만 같아..."

요정의 정신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기에, 김리는 레골라스의 팔꿈치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얼마나 빠르게 그의 정신을 햇빛 아래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 다급히 생각하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러자 레골라스는 시선을 내려 눈을 맞추고는 조금 웃었으나, 아직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잠든 것 같은 기분이야, 김리. 여기는 너무 어둡군. 이 꽃은 어둠 속에 수천 년 동안 이대로 남아 있겠지. 반쯤 피어나 아름다움을 뽐내고 반쯤 닫혀 돌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는 감추면서, 시들지도 바래지도 않은 채로." 김리는 팔꿈치를 잡아당기고 있었으나 그는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말하는 듯했다. "이대로, 꺾을 만큼 무르익는 날은 결코 오지 않겠지."

김리는 그런 시적인 공상에 약간 거북함을 느끼며 다른 발로 체중을 옮겼다. 자신의 말이 평범한 돌멩이라면 레골라스의 찬사는 로슬로리엔의 정교하게 조각된 바닥 같았고, 그 가느다랗고 기이한 나무 높다란 곳에서부터 드리운 그늘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기분은 나타났을 때처럼 금세 사라졌고, 심란함에 찌푸린 얼굴을 떨쳐내기도 전에 레골라스는 아직 팔꿈치에 얹힌 김리의 손을 감싸쥐고는 당황한 그에게 웃어 보였다. "더럽혀진 무구를 치우도록 하지." 그가 말했다. "자네도 일을 능히 할 수 있겠다면 말이야." 그리고는 분해서 끙 소리를 내는 김리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가 머리칼이 먼지에 얼룩진 햇빛처럼 어깨 위로 흩어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버드나무 가지처럼 우아하게, 유연하게 몸을 굽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팡고른 숲에서 온 나무의 무리와, 고대의 엔트 여럿 사이를 행군하며 하루를 보냈다. 오랜 큰길을 따라간 끝에, 한밤중에서야 그들은 이제 텅 빈 땅바닥에 지나지 않는 이센 강의 바짝 마른 강둑에 야영지를 꾸렸다.

그는 뼈다귀가 담긴 푸댓자루처럼 아로드의 등에 실려, 레골라스의 등에 매달려 들썩대며 열흘을 더 달렸다. 그간의 경험으로 덜 불안정하고 덜 서툴러지기는 했으나, 김리는 말등 위가 그가 있을 곳이 아님을 알았다. 배신자 사루만의 목에다 그의 도끼 날을 갈 기회를 위해서라면 그는 열흘이라도 더 안장 위에서 견딜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레골라스가 춤추듯 우아하기 그지없는 모양으로 안장주머니를 풀 때, 식사를 할 때, 불을 피울 때, 조금 찢긴 튜닉을 손볼 때 그의 아름다운 머리통과, 아름다운 얼굴과, 달빛에 빛나는 뺨 위로 드리운 새카만 속눈썹을 바라보며 그와 야영지에서 아흐레를 더 보내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그랬다. 그들 사이에는 말로 할 것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 그것 때문에 그의 피는 아주 조금 더워졌고, 너무나 할 말이 많아 서툴고 무거워진 혀가 입속에서 뜨끔거렸다. 그가 지금껏 하지 않은 말이 무엇이었던가? 죽음의 망령은 다시 한번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그것으로 그의 조바심은 모두 사라졌어야 했다. 김리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요정은 다리를 멋드러지게 꼬고는 작은 모닥불 앞에 앉아 김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게, 친구." 그가 말했다. "자네 머리 깨진 것 좀 보자고."

김리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지만, 레골라스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괜찮아." 그는 말했다. "그냥 긁힌 거라니까."

그 말에 레골라스가 코웃음쳤다. "그렇다면 이 더러운 붕대는 치울 수 있게 해주겠지. 부상당한 채로, 찢어진 천조각이 엉켜 눈을 덮고 땋은 머리칼에 먼지가 앉은 꼴로 배반자 사루만과 맞서지는 않을 테니?"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는 요정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불이 딱딱거리며 레골라스의 얼굴 위로 경쾌하게 춤추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열기가 그의 뺨과 손등을 쓸었다.

말투가 달라졌다. "이리로 와, 김리." 그는 간청하고 있었다. 어떤 생물이 불 앞에 앉아 있더라도 불길에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정교하게 땋은 머리타래 사이로 비단결 같은 머리칼이 삐져나온 이 잘생긴 숲속요정만큼 매혹적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김리는 홀린다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기도 모르는 새 레골라스의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요정어 속삭임이 들려오는 가운데 무거워진 눈꺼풀이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손을 가슴에 포개고 그 무릎에 누워 있을 리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 레골라스가 당부했고, 이마 위로 따뜻한 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의 땋은 머리를 풀고 머리칼을 치웠다. 이제 그 손끝은 '긁힌 자국'을 따라 두피를 가볍게 닦아내고는 치웠던 머리칼을 제자리에 놓은 뒤... 그렇다. 부드럽게 손으로 빗어내리고 있었다.

"이젠 좀 적 앞에 나설 만하겠어?"

"자네 곁에 서는 게 자랑스러울 만큼. 자네 머리 땋은 모양이 요정의 것임을 알아챌 자는 없을 테고 말야." 김리는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단단하고 놀랄 정도로 무거운 손길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아니야, 김리. 괜찮아. 내게 맡기고 쉬어."

머리 아래 놓인 무릎은 따뜻했고, 위에 있는 얼굴은 희고 흐릿한 그림자 같았는데 이는 김리가 굳이 눈을 뜨고 제대로 쳐다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이 쉭쉭대고 딱딱거렸다. "그러니까 내 머리를 땋겠다 이거지, 요정." 김리가 말했다. "자네 놀랍도록 손이 굼뜨군." 경쾌하게 머리를 빗어내던 손가락이 멈추자 두피가 뜨끈하고 얼얼했다. 김리의 머리칼 절반은 레골라스만큼 곱게, 아니, 곱지는 않더라도 분명 가지런하게, 레골라스의 허벅지 위에서 묵직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우리 요정식으로 머리를 땋으려면 먼저 엉킨 곳이나 매듭이 없어야 하거든."

온기에 취해 나른해진 김리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자네가 이렇게 빗고 나면 언젠가 머리를 매듭지어 묶고 싶더라도 그러지 못할까 걱정이군."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리로, 김리." 레골라스는 그날 밤 두 번째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김리는 금세 그 말에 따르는 법을 익히는 중이었다. "인정해. 마음에 들잖아." 그가 서늘한 손을 김리의 머리칼 속으로 넣어 뒤통수를 감싸자 땋아내린 머리채가 손바닥에서 넘쳐흘렀다. 손가락 끝이 김리의 머리에 닿으며 서늘한 불꽃이 터지듯 뜨끔거리는 감각을 일으키고는, 작디작은 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김리는 자신이 그리 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대답을 한 것 같지도 않았으나, 레골라스는 대답을 들은 양 말하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결국에는, 우리 둘 다 이러기를 원한다면, 이러는 것이 편하다면..."

그의 의식 일부는 정신을 차리려 분투하고 있었다. 깨어 있기를 원하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골라스의 한 손이 그의 머리칼 속에, 다른 한 손은 가슴 위에 얹혀 있었으며, 이런 즐거움의 파도에 익숙한 적 없는 그의 피로한 몸은 경계 신호를 울리기에는 따뜻했고 안전했으며 지나치게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레골라스'라고 크게 외쳐 불렀음을 알았으나, 얼마나 크게 불렀는지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레골라스는 가까이 몸을 숙이기는 했으나 부름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네 머리처럼 고운 것은 본 적이 없어." 그는 말했다. 김리는 그 터무니없는 발언에 반박할 말을 애써 떠올리려 했으나 요정이 몸을 온통 숙여 오자, 요정의 머리칼이 김리의 위로 드리웠고 코끝은 김리의 머리칼에 닿았다. 그는 김리의 귀 뒤에 얼굴을 묻고는 새끼 고양이나 조랑말이 애정 표현을 하듯이 코끝을 문질렀다. 뜨거운 숨결이 김리의 목덜미에 속살거렸다.

물론, 그가 하려던 모든 반박의 말은 사라져 버렸다.

그는 "어제 그건 뭐였지?" "이건 무슨 뜻이야?"라고조차 묻지 않고 레골라스의 손 아래에 가만히 누워서는 그저 고개를 틀어 뒤로 기울였다. 레골라스의 입술과 그의 귀 사이에는 아주 작은 공간만이 남았고, 그들은 그대로 멈추었다. 레골라스가 속삭였다. "나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지 마. 자네도 나만큼이나 어제 죽을 뻔했어, 난쟁이. 그리고 내가 가만히 앉아 자네 죽음을 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 마. 어떤 중대한 위험 속이라도 쫓아가 내 목숨을 치르고 자네를 구했을 테니까. 감히 나를 의심하려는 건가?"

김리는 감히 무엇도 하려 하지 않았다. 레골라스의 빈 손이 그의 가슴에 펼쳐진 채 얹혀 있고, 그의 상의 끈은 왜인지 풀려 있으며, 그의 심장이 그 손끝 밑에서 쿵쿵 뛰고 있는 한에는 그랬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레골라스의 말은, 그의 입술 끝은 김리의 귀와 뺨을 더듬고 그의 금발 끝은 김리의 열린 입술을 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난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리도 다정하게... 레골라스는 꿈결 같았으나, 김리의 꿈의 범위를 훌쩍 벗어나 있었다. 그가 몸을 구부려 다시 한번 가만히 닿아 왔다.

"의심하지 마." 레골라스가 말했다. "김리, 자네는 죽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의 입술이 김리의 입술에 거꾸로 포개지며 부드러운 감촉과 열기와 묘하고 습한 요정의 맛이 천천히 뒤섞였다. 그가 눈꺼풀도 의식도 닫은 뒤 꿈 속으로 빠져들 때까지.

 


 

새벽의 잿빛 속에서 일행은 말에 올랐다. 레골라스는 언제나처럼 김리의 손을 단단히 붙잡아 아로드의 등에 올려 주었고, 김리는 잠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속절없이 손을 허벅지에 얹었다. 레골라스는 말에게 무어라 속삭였는데, 말은 어떤 난쟁이라도 올라탈 엄두를 못 낼 정도로 기운이 넘쳤다. 말이 앞으로 달려나가자 김리는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주었고, 레골라스의 무릎이 말의 옆구리를 죄는 것과 같이 김리의 무릎 역시 레골라스의 엉덩이 양쪽을 죄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레골라스의 가죽 조끼 밑 허리의 늘씬한 곡선을 더듬었다. 요정은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며 불빛처럼 밝은 미소를 비밀스럽게 지어 보였다. "김리, 날 속일 생각은 말게. 자네의 굳센 심장은 아무 것도 겁내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그러고는 김리의 손을 쥐어 제 허리에 단단히 감았다.

이제 그의 팔에 안긴 요정의 몸선만큼 친숙한 감각은 몇 되지 않았다. 바람에 부딪히는 머리칼과 로슬로리엔의 먼지 묻은 망토에서 나는 냄새와 함께 그 친숙함이 나른하게 뼛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낀 순간 김리는 인상을 썼다. 처음에 레골라스는 ― 제 마음을 알 시간이 필요하다며 ― 이해할 수 없는 부정을 하더니 이제는 입맞춤을 하고, 이젠 미소를 지어 보인다. "망할 요정." 그는 수염 속으로 웅얼거렸다. "수수께끼 같은 소리 말고는 제대로 된 말을 하지 않는다니까." 레골라스가 들을 수도 있음을 알았으나, 그는 그 말을 혀끝에서만 맴돌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이 말 위에 있고 싶지 않다는 의사야 이미 충분히 밝혔던 것이다. "수수께끼나 내면서 불멸의 삶을 보내고는 웃겠지. 죽음이 찾아와 멍청한 목숨을 거두어갈 때까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리 될 것이었다. 수천 년 후에, 김리가 먼지가 되고 레골라스에게는 기껏해야 추억이 되었을 때에.

아니,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간밤에는 그곳에, 오늘 아침에는 그의 눈빛 속에 있었다. 레골라스는 죽음에 웃음 이상의 것으로 맞서고 있었으며, 그가 김리와 죽음 사이를 자기 자신의 목숨으로 막겠노라고 선언했을 때에 그의 분노는 김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게 놔두느니 내 스스로 더 일찍 죽겠어." 그는 중얼거렸지만, 그 생각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몸이 떨렸다.

레골라스는 그가 가까이 붙는 것을 알아차리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아주, 아주 나중에, 아로드의 발굽이 만드는 박자가 김리를 거의 잠들게 만들 무렵,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나의 난쟁이. 요정의 방식은 자네에게 이상할 테지." 어쩌면 자신이 잠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김리는 생각했다. 그의 눈은 아직 투구 밑에서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감긴 채였으나, 그는 몸이 깨어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언제 손가락이 레골라스의 것과 얽혀든 것일까? "자네는 나를 믿어야 해."

"내가 자네를 안 믿은 적 있나, 요정?" 그가 불퉁하게 따졌다.

어쩌면 그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의 동료가 그 다음으로 한 말은 고작 "자네 머리 땋은 것은 괜찮은가?"였기 때문이다. 김리는 대답할 말을 몰랐고, 그들은 침묵 속에 말을 몰았다. 레골라스는 낙담하지 않고 목소리에 웃음기를 띤 채 말을 계속했다. "머리를 가만히 두기만 하면 백 년은 갈 거야. 오늘 하루는 넉넉히 버틸 것 같군."

아로드는 로한의 기수가 타는 말답게 공중으로 나는 새와 같이, 레골라스의 활을 떠나는 화살과 같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목표를 향하여 땅을 박차며 달렸다. 해가 떠올랐고 어지럽고 잡초 투성이인 사루만의 땅이 그들을 둘러쌌다. 땅은 으스스하도록 생명이 없었으며 태양 아래에서도 새벽빛처럼 희부연 잿빛을 띠었다.

다음 순간 김리는 레골라스가 자신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요정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자네만큼 살았을 적에, 나는 겨우 어린 아기였지. 김리, 내가 자네 나이보다 열 배를 살았을 때에도 나는 아직 어렸고 정말 어리석었어. 지금 엘론드 공이 날 보면 어리고 멍청하다고 하실 테지." 그는 웃었다.

김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두린의 일족은 도끼와 곡괭이 휘두르는 법을 배우는 데에 천 년이나 쓰는 사치는 꿈도 못 꿔."

"과연 그렇지." 레골라스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만큼 필요하지도 않을 테고. 가끔은, 김리. 자네 옆에 있으면 어려진 기분이 들고, 우리가 지낸 그 모든 시간조차도 내가 숲의 봄 한 번을 노래하는 시간에 견주면 눈 깜빡할 시간인 것처럼 느껴진다네."

"어려진 기분이라." 김리가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그는 레골라스의 망토 아래 가슴 밑으로 마주잡은 손이 거의 아플 정도로 힘을 주었다. 요정의 다음 말은 희미한 속삭임이었기에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래. 그리고 나는 더 어려지고 있는 것 같아."

 


 

"서두르지 않도록 하지." 레골라스가 발걸음을 멈추고 부서진 돌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이센가드의 벽에서 떨어진 커다란 파편이었다. 그의 눈은 먼 곳에 못박혀 있었다. 파편은 엔트의 손에 내던져진 채 놓여 있었는데, 레골라스의 허리보다 높은 크기로 본래 있던 벽이 무너진 자리를 그대로 잇고 있었다. 요정이 나무에서 잎을 따듯 엔트의 커다란 손이 아무렇게나 벽에서 찢어낸 것이었다. 난쟁이 열 명의 무게에 맞먹을 것이 여기에 서 있었다. 엔트는 가볍게 화를 내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루만은 이 나날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었다.

레골라스의 모습에 아이센가드의 군대 또는 나즈굴이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포착했을 때와 같은 기색은 없었다. 그의 푸른 눈은 오로지 깊은 생각에 잠겨 아득히 흐려져 있었다.

그날 오후 그는 간달프가 팡고른 숲의 엔트 가운데 가장 나이 많고 위대한 자라 칭한 나무수염 앞에 서서 김리를 신뢰할 만한 동료라 단언하였고, 그를 숲에 데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김리가 살아 있는 동안," 레골라스는 말했다. "저는 팡고른 숲에 홀로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김리는 밑을 내려다보며 수염 속에 얼굴을 숨기고 몰래 미소지었다. "무슨 뜻이지, 요정?"

"말 그대로지, 난쟁이 선생." 레골라스가 말했다. "전에는 결코 시간이 두렵거나 의미를 지닌 적이 없었어." 그는 눈길을 내려 김리와 진지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얇은 천처럼 해 앞으로 떠밀려온 구름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워 변덕스러운 눈동자를 새카맣게 물들였다. "내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말을 자네가 요구했을 때로부터 고작 이틀이 흘렀는데, 나는 그 이틀을 보낸 게 통탄스러워. 이틀을 말야, 김리." 그는 절박하게 말했고, 김리는 그날 두 번째로 손이 꽉 붙잡혀 짓눌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싫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결코 바뀌지 않을 이틀..."

"자네는 필멸자에게 말하고 있어, 요정 선생." 김리가 말했다. 레골라스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어두워졌고 그는 불안감을 덜어주려던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김리." 그는 나직하게 말하며 흙 위로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 줘."

용서도, 비난도, 다른 어떤 생각도 입술 밖으로 낼 시간이 없었다. 오로지 숨결 한 번의 시간이 지나자마자, 레골라스의 굉장히 요정답지 않은 열기가 그의 입술을 덮치고, 그의 손이 갑옷과 가죽 위로 김리의 허리를 꽉 움켜잡았다. 투구가 떨어졌지만 주의를 끌지 못했다. 레골라스의 날쌘 손끝이 요정식으로 단단하게 땋은 머리채를 물처럼 가르고 파고들었으나 김리의 갑옷에 가로막혔다.

요정의 목에서 으르렁거림 또는 흐느낌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고, 그는 김리의 갑옷 옆구리 끈을 당겨 풀어냈다.

김리는 옷을 스스로 벗기 위해 그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이 편이 빠를 거야... 레골라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틀은 그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자네가 우리 갑옷을 2분 안에 벗겨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거라고."

레골라스는 그 말에 잠시 미소지었지만 김리의 시야는 머리 위로 갑옷을 벗느라 가려져 있었다. 시원한 공기가 바깥에 드러난 색 엷은 피부로 밀려왔으나, 눈이 가려진 동안 레골라스는 자신의 셔츠와 웃옷에서 빠져나와서는 팔을 뻗어 벽의 파편이 만든 그늘로 김리를 끌어당겼다. 등에 소름이 돋았고 레골라스의 손은 조심스럽게 그 흔적을 좇았는데, 그 손길은 놀랍도록 단단했다.

말등에서 지낸 그 긴 나날 뒤 그 손길은 익숙하고 편안했으며, 입을 것을 사이에 두지 않고 맞닿은 살갗의 불붙는 듯한 열기는 마치 깊고 따뜻한 물에 뛰어든 것처럼 순간 충격을 주었다. 자연스러웠다. 신선한 흙처럼 자연스럽고도 달콤했으며, 언제나 그는 레골라스를 그의 품에 두고 있었기에 그의 두 팔은 온 가운데땅에서 가장 익숙한 곳에 있는 셈이었다. 동시에 그는 레골라스의 온 생애를 통틀어 이와 같이 그를 꼭 끌어안을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을 것이었다.

김리의 온몸이 긴장으로 웅웅 울렸다. 다른 많은 것이 그렇듯 새롭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요정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곧바로 그의 머리칼 속에 손을 묻었고, 나머지 한 손은 그의 등을 훑고 내려가 반바지에 덮인 엉덩이 위에 지그시 놓였다. 맨살이 닿은 것은 아니었으나 불길은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타올랐다. 그가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손으로 취한 위안에서 느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김리는 무언가 외치려 입을 벌렸으나, 제 요정의 입 속으로 마치 기도처럼 "레골라스"라는 이름을 뜨겁게, 힘껏 흘려넣었을 뿐이었다.

입술에 맞닿은 미소가 느껴졌고, 반바지 끈을 푸느라 분주하던 레골라스는 손을 멈추고 김리를 꼭 붙잡은 뒤 웃었다. "내 사랑, 물고기처럼 펄떡대고 있군."

김리는 얼굴을 붉혔으나 반격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는 그가 애타게 원하던 대로 얼굴을 레골라스의 턱 아래, 귀 뒤에 묻고 그가 너무나 잘 아는 향기의 근원을 찾았다. 그의 아래에서 레골라스는 길고 늘씬한 한쪽 허벅지를 김리의 허벅지 사이에서 아프도록 단단해진 것으로 움직이기 위해 몸을 들썩였는데, 그와 동시에 문제의 바지끈을 풀어내고는 연약하고 귀중한 과일을 어루만지듯 가죽옷을 벗겨냈다.

"내가 불평하는 거라 생각지 마," 레골라스가 속삭였다. "자네가 펄떡인다고 해서 말야, 김리. 실은, 그게 무엇보다도..." 김리는 두 빗장뼈 사이, 요정의 목 움푹 패인 옆으로 도드라져 나온 매끈한 금빛 힘줄을 발견하고 부드럽게 깨물었다. "아아, 김리!" 그는 열에 달뜬 욕설 또는 사랑의 말을 제 모어母語로 연신 속삭이고 작게 부르짖으며 김리의 입술을 거듭 찾았다.

그는 아까 전까지의 부드러움은 잊었으나, 다정하게 서로의 다리를 얽어 단단히 끌어안고는, 느리고 나긋하고 우아하게 몸을 비틀었다. 김리는 달아올랐다. 배가 긴장으로 조여들었고 주체하기 어려운 갈망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몸이 맞닿는 곳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의 몸뚱이를 예술 작품인 양 더듬는 레골라스의 손길을 따라 고문 같은 달콤함과 더해가는 황홀경이 파도를 이루어 연이어 밀려왔다.

그가 알았던 어떤 쾌감과도, 그가 꾸었던 어떤 꿈과도 달랐다. 레골라스 역시 제대로 된 소리도 말도 내지 못하고 숨을 삼켰기에 김리는 둘의 기분이 같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열기 속에서 레골라스의 바지가 사라졌고, 둘은 서로의 팔다리를 얽은 채 앉았다가 또 함께 넘어지며 웃었다. 레골라스는 김리의 서툰 손가락이 끈을 풀어내도록 내버려두고, 두터운 가슴털 속에 손을 밀어넣어 그 아래 연한 살을 완벽하게 모양 잡힌 요정의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마침내, 모든 방해물을 벗어내고서 김리는 자신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그의 눈이 레골라스의 모습을 가만히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레골라스의 품으로 다시 끌려들기 직전 잠시뿐이었으나, 맞닿은 팔뚝과 목덜미와 배로 그 앞에 펼쳐진 요정의 아름다운 몸이 눈으로 보는 듯 그대로 느껴졌다. 체모로 덮인 허벅지가 눌러 오는 레골라스를 감싸며 벌어졌고, 입술이 잠시 떨어진 순간 올려다보았을 때 요정의 얼굴은 창백하고 핼쑥했으며, 눈은 감겨 있었고, 이마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레골라스." 그는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고, 그 이름은 그저 으르렁대는 소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푸른 눈이 번쩍 뜨였다.

"할 수 있겠어?" 그가 속삭였다. 그는 레골라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청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로 이 느낌은 알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김리는 그의 요정이 어떻게 생각하든 난쟁이 사이에서는 젊었다. 그의 육체는 최근 몇 해 사이에 비로소 완전히 깨어났을 뿐이었다. 혹은, 레골라스의 골반이 그의 맥동하는 단단한 기둥에 무게를 싣는 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리 생각했다. 이제 김리는 이제껏 살면서 이렇게 완전히 깨어난 적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이 점에서는, 레골라스가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것이 분명했다.

레골라스는 다시 입맞춤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다른 감각을 완전히 덮어버리려 열린 채 내려앉는 입술은 이제 완전히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얼굴을 옆으로 기울였고, 김리의 입술 사이로 뜨겁고 미끌대는 혀가 미끄러져 들어와 입속으로 숨가쁜 원을 그리며 마법처럼 그의 혀를 휘감았다. 맞닿은 입술이 웃음을 지으며 틀어지자 그 감각에서 한 순간이라도 벗어나지 않으려 입술을 따라 고개가 움직이고 항의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레골라스의 인내심은, 어쩌면, 춥고 부서진 아이센가드의 바람을 막는 돌벽 밑보다는 숲의 나무그늘에 더 걸맞는 것인지도 몰랐다. 김리가 요정의 머리를 양손으로 살며시 감싸고 그의 손끝이 절로 섬세하고 기다란 귀를 쓰다듬다 마침내 그 끄트머리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는 레골라스가 자제심을 잃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레골라스는 전율했고, 입은 벌어진 채 입맞춤조차도 잊었다. 김리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아." 그는 탄식했고, 김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그의 짧은 다리는 요정의 골반에 둘러져 있었다. 말을 탈 때 다리가 벌어지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그러한 압박은 그의 근육에도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것이 둘의 몸뚱이 사이에 갇힌 감각은 달콤했으며, 레골라스가 몸을 꿈틀대자 요정의 길고 늘씬하고 살아 있는 열기가 그의 샅과 허벅지 사이로 치솟아 자신의 축축하고 미끌대는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레골라스," 김리는 불렀다. "레골라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이를 말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나, 뜻은 충분히 전해진 모양이었다. 레골라스의 양손이 다시금 그의 엉덩이 근육을 한껏 움켜쥐고 그를 들어올렸으며 늘씬한 손가락이 그 골짜기를 더듬어 그의 육체로의 입구를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의 손길에 김리는 신음을 내지르며 다리를 조였다. 순간 그는 레골라스의 길이에서 오는 열기를 느꼈고, 그의 몸뚱이에 있는 모든 신경이 괴로운 양 팽팽하게 조여들며 수천 개의 망치가 쇳덩이를 두들길 때처럼 불협화음을 울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숨이 덜 찼더라면 재촉하며 애원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김리의 엉덩이에 얹힌 손이 떨리기는 했으나 레골라스는 김리를 제대로 이끌었고, 열기와 두 번의 심호흡과 길고 느리게 밀어붙이는 몸짓에, 둘의 살은 한 순간의 불꽃 같은 고통과 함께 한데 녹아내렸다. 그러나 그 감각은 육체의 간절한 갈망이 부르는 고통을 한 순간 잠재웠을 뿐이었다. 갈증을 푸는 한 모금의 다디단 독주처럼, 목구멍을 느리게 흐르며 그 전보다도 지독한 갈증을 깨워냈을 뿐이었다. 순간 동안 그는 완전한 충족감을 느꼈고 둘의 육체는 함께 안식하는 듯했으나, 그의 뱃속 깊은 곳을 갉아먹는 욕망에 그는 신음을 토했고, 서툴게 몸을 들썩이며 스스로의 손으로 하던 것처럼 허리를 움직였다. 뱃속에서 감각의 파도가 솟아오르고 또 내려앉았으며, 이제 완전히 말이 없어진 레골라스의 눈은 밝게 번득여 김리는 눈을 돌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레골라스는 능숙하게 둘의 몸을 움직이며 김리의 골반을 붙잡은 손으로 그를 위아래로 이끌었다. 느리게 물러났다가는 속도를 내어 아까보다 그의 몸 깊숙한 곳으로 밀어붙이는 듯했다. 그들은 금세 박자를 찾았고, 이를 악물며 달라붙고 또 떨어질 때마다 신음했다. 마침내 그의 몸뚱이가 움직임에 익숙해져 주의를 다른 데 돌릴 수 있게 되자 김리는 레골라스의 벌어진 붉은 입술에 다시 한번 입맞추기 위해 몸을 숙였다. 둘의 이가 아프게 부딪쳤고 순간 요정의 피 맛이 혀에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으르렁거렸고, 레골라스의 흔들림 없던 움직임이 동요했다.

둘은 헐떡였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거칠고 빠르게 밀어붙이는 것이 고작인 채로. 한 번의 움직임마다 새로운 감각의 뭉터기가 깨어나 절정을 갈구하게 했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쾌감이 커지고 또 커져만 간 끝에, 그는 갈 곳 모른 채 그 무게에 짓눌리고 말았다. 레골라스가 그의 품에서 몸을 굳히며 탄성을 뱉었고, 둘은 완전히 소진된 채 가까스로 서로를 향해 몸을 웅크리고 쓰러졌다. 바람이 그들 위로 속삭이며 땀을 식혔다. 둘은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고, 김리가 알아채지 못한 사이 둘은 잠이 들었다.

"요정." 김리는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입을 열었고, 레골라스는 대답이 되다 만, 왜 그러느냐는 듯한 목쉰 소리를 그의 머리칼 속으로 겨우 속삭였다. 레골라스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김리는 미소지었다. "여기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두다니, 오늘 아주 위험한 짓을 자초한 거야."

"내버려두다니." 레골라스가 속삭였다. "나의 걸걸하고 불평 많고 아름다운 난쟁이, 난 어떤 것도 그저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이 날은 아주 신중하게 계획된 것이라는 걸 알려주지."

김리는 웃었다. "자네가 원한 게 고작 이 차갑고 딱딱한 땅바닥이었다는 걸 내게 믿으라고 할 셈-"

레골라스는 논리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왜 자넬 이 부서진 돌벽으로 데려왔다고 생각해? 무엇을 위해 내가 오늘 아침에 자네 튼튼한 손을 그리도 열심히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김리?"

김리는 연인의 길고 미끈한 다리 사이로 제 다리를 느긋하게 밀어넣고는 고개를 돌려 요정의 부르튼 입술에 입맞춤을 졸랐다. "자네의 치밀한 계획 속에 담요는 없었군그래."

한 손이 머리칼을 빗어내렸고, 레골라스가 단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없는걸. 그리고 나는 시간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