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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턴만 더……

Summary:

게임개발부가 문명 시리즈와 처음으로 조우했다.

이거,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Notes:

Chapter 1

Notes:

(See the end of the chapter for notes.)

Chapter Text

모든 것은, 으레 그렇듯이, 모모이가 성가신 일을 벌이는 데서 시작됐다.

사이바 쌍둥이 중 분홍색 왈가닥 언니 쪽은 문제를 만드는 류의 인간이다. 그 문제에 동생은 물론이고, 게임개발부를 동아리 째로 끌어들이는 거다. 궁극의 시나리오를 찾기 위해서라면 모모이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전을 할 각오가 있었는데—— 보통 그 도전은 장난질이었다. "아는 것을 쓰라"는 말마따나, 모모이는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는 빈둥거리든지, 미도리를 귀찮게 하든지, 영혼까지 짜부라트리는 유우카의 허벅지로부터 도망가든지…… 그렇게 게임 시나리오를 쓰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행동으로 발현이 되었다.

게임개발부 넷은 방식을 바꿔 보기로 마음먹었다. 부푼 야망을 떠안고 장대한 대서사시 같은 크고 무거운 판타지 RPG를 개발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단순한 프로젝트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그런 게임에도 시나리오 작가는 필요할 터다. 덕분에 모모이의 업무량은 (애초부터 적긴 했지만) 더 줄어들었고…… 결국 모모이는 더 농땡이를 부리게 됐다. 피할 수 없는 피드백 루프다.

이번에 모모이는 선생님을 귀찮게 해 볼까 하고 있었다. 샬레의 고문 교사는 자신의 일이 얼마나 남았든지 관계없이 방문하는 모든 학생들을 반겨 주었다. 그런 면에서는 모모이와 정 반대의 인물상이었다. 아니, 모모이의 영원한 숙적이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흐음, 너무 깊게 생각하는 듯 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니…….

……거기다가, 제발 아니기를 바랐건만, 선생님도 빈둥거리고 있었다. 한 술 더 떠서……, 찌질하게 굴기까지?

"아, 제발 좀……." 눈을 찡그려 안경 너머로 널찍한 모니터를 응시하던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단순한 사무실용 워크스테이션일 터인 선생님의 PC는 휘황찬란한 RGB 불빛이 반짝여 한 눈에도 최상급의 PC로 보였다. 어떻게 선생님이 유우카의 그 악독한 구두쇠 기질을 이겨내었을지 모모이는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이 까리한 GPU 다섯 개 짜리 컴퓨터가 있으면 키보토스의 기적과도 같은 일꾼의 효율을 더욱 높여줄 수 있어", 뭐 그런 내용이 아니었을까? 왠지 그게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선생님은 또 무슨 노잼 어른용 게임을 하는 걸까? 레트로 게임이 나쁜 건 아니지만, 레트로 게임을 즐기기 위한 올바른 하드웨어가 필요할 터였다. 이런 고대 유물을 반짝반짝한 새 컴퓨터에 집어넣는다는 것 부터가 모모이에게는 극악한 신성 모독으로 보였다. 오뜨 퀴진[1](이 이상한 말을 모모이에게 알려준 히마리 선배에게 감사를 보낸다)을 동네 회전초밥집에서 내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카이저 게임즈를 위시한) 피도 눈물도 없는 AAAAAA 게임 업계의 최신 타이틀은 엄청난 성능을 필요로 했고, 과거 따윈 내팽개쳤다는 듯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여기 앉아 화질 떨어지는 자신의 노란 스키 슈트 입은 사람을 또 다른 화질 떨어지는 까만 옷에 총(?)을 든 사람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끔찍한 효과음이 울려퍼지고 두 사람이 맞붙었다. 그러자 두 사람 위의 초록색 막대가 (선생님 편은 파란 색이었고 상대방은 빨간 색이었다) 사라지기 시작하고, 노랗게 변했다가 빨갛게 변했다.

스키 사람은 HP를 아주 약간 남기고는 살아남았다. 팝업 메시지가 뜨더니 그 사람은 전장에서 용맹함을 보여 베테랑이 되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눈을 굴려 다른 화질 나쁘고 까만 슈트와 보랏빛 방패를 든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게임 끝날 때까지 이 인간들을 치우고 있겠구만……." 선생님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방패를 눌러 턴을 돌리다가—— 주뼛주뼛 서 있는 모모이를 발견했다.

"아, 안녕! 어, 몰래 들어와서 미안해, 선생님. 그래도 뭔가 재밌어 보인다!"

"아냐, 미리 눈치 못 채서 미안해. 정신이 팔려 있어서." 남자는 키보드에 엔터 키를 누르고 (맹세코 모모이에게는 여자아이가 "엔터"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의자를 돌려 AI의 턴을 진행시켰다. "차나 커피 줄까? 아니면, 어, 주스라도?"

"괜찮아! 바빠 보이면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거든. 이 게임 이름이 뭐야?"

"아, 이거?" 선생님은 다시 모니터로 잠시 몸을 돌렸다. 주황색 방패를 들고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천천히 하나씩 선생님의 도시로 전진해 들어왔다. "문명 2야. 음, 시드 마이어의 문명 2. 어릴 때 자주 했거든."

"선생님한테 어릴 때가 있었어?!" 모모이는 깨달음에 충격을 받고서 입을 떡 벌린 채 굳었다. 남자는 그런 그를 어리벙벙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니, 누구든지 어린 시절은 있잖아." 뭐, 누구든지 그런 건 아니겠지만 모모이는 그런 점은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저번에 붉은겨울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멀쩡한 플로피 디스크를 찾았어. 옛날 생각이 나서 사 버렸지."

"플로피 디스크가 뭐야?"

"……너네 부실에 패미컴이 있는데 플로피 디스크가 뭔지 몰라?"


모모이에게 줄 핫초코를 준비하면서 (당번 외 일로 찾아온 학생들에게 항상 선생님이 대접하는 거였다) 선생님은 문명 2에 대한 설명을 더 늘어놓았다.

문명 2는 (선생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용어라곤 했지만) 4X 게임이라고 했다. 탐험(explore), 확장(expand), 개발(exploit), 섬멸(exterminate)의 X를 모두 딴 명칭인데, 사람들이 세운 나라를 전부 시뮬레이션하는 턴제 전략 게임이란다. 문명의 경우는 키보토스 바깥에 실존하는 나라(이미 사라진 나라와 아직 남은 나라 모두)를 따 와서 역사를 축소판처럼 훑어보는 게임이었다. 프랑스인들이 갓 정복한 런던에다가 피라미드를 짓는, 그런 축소판 말이다.

"이건 역사의 다시보기같은 게임이 아니야, 모모이. 그렇지만 역사를 힌트로 써먹을 수는 있지." 선생님은 게임 용어부터 발명 가능한 기술까지, 게임에 관한 모든 것을 망라한 문명백과 창을 열며 설명했다. "새로 나온 것들은 이거보다 훨씬 더 자세한데, 나는 문명 신작은 안 해. 너무 자잘한 게 많거든."

"이렇게까지 자세하면 게임 내용도 진짜 많겠다." 핫초코에서 몽글몽글 모습을 내보이는 마시멜로우 방울을 멍하니 쳐다보던 모모이가 혼잣말을 했다. 선생님은 키보토스에서 따뜻한 음료를 가장 잘 만드는 사람이었다. 트리니티의 무지막지한 슈거 엠포리엄도 선생님에게는 한 수 접어주고 들어가는 상대다.

"이거? 아냐, 이정도면 초심자용이지. 난 머리가 나빠서 이것보다 스케일 큰 게임은 못 해." 선생님은 이것보다 복잡한 타이틀을 꺼내 보여주었다. 크루세이더 킹즈라고 한다. 모모이의 눈앞에 끝없이 이어지는 표와 파일과 숫자와 작은 글자의 폭격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모모이의 눈앞은 벌써부터 흐릿해졌다. 맞네, 이건 백 퍼센트 어른용 게임이 맞아. 모모이에게는 이렇게 복잡한 게임을 할 시간도, 참을성도 없었다. 유즈라면 좋아할까? 부장이라면 이런 거에 시간을 쏟아부을 만 한데.

흐음.

"문명 7이 곧 나온다는데, 나는 사전구매는 안 하는 주의라서." 선생님은 그렇게 운을 떼고 문명 6에 관한 웹사이트를 열었다. 몇 년 된 게임이었지만 문명 2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픽이 최고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고, 어디가 언덕인지 구분하기 힘들긴 했지만 이 정도 세련되고 예술적인 표현은 (미도리의 전문 영역이긴 하나) 모모이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번 해 보는 게 어때? 다른 게임개발부 애들도 같이. 온라인으로 대전할 상대를 찾는 것도 좋겠다."

"에엥, 잘 모르겠어. 난 뭐든지 쉽게 질리거든. 이 게임 보면 스미레 선배가 밀어주는 그네에 타는 것보다 더 빨리 새파랗게 질릴 것 같은데." 선생님은 모모이의 말장난에 깔깔 웃음을 터뜨렸지만 곧 굳은 얼굴이 되었다. 바로 얼마 전 의욕이 너무나도 넘치는 트레이닝부 부장과 달리기를 한 탓이다.

"네 동생하고 편을 먹어도 될 거야." 선생님은 '그래야지 유즈와 아리스를 이길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르니까'라고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런 말은 (특히나 객관적으로 사실을 적시하는 거라면) 예의 없는 짓이 될 테니. "그게 아니면 각자도생이야. 동맹을 맺어도 뒤통수를 칠 수 있거든. 부루마블이랑 비슷한데 더 재밌는 거야."

"부루마블이 뭐야?"

선생님은 절망한 얼굴로 모모이를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하다.

무소식이 곧 비소식이라고 생각하는 유우카가 신경과민일지도 모른다. 보통 무소식은 희소식이 아닌가. C&C가 멋대로 재물손괴를 일으켰다는 보고서가 올라오지 않고, 엔지니어부가 총 달린 메카를 또 만들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스미레가 불쌍한 신입생을 붙잡고 영혼이 빠져나갈 때까지 훈련을 시킨다는 소문이 떠돌지 않는다니,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러면 유우카에게 남은 일은 세미나 임원 겸 샬레의 비서로서 할 일 밖에 남지 않을 터다.

심지어 그 일마저 요즘에는 꽤 편안했다. 최근 커다란 사건이 벌어진 일도 없었고, 놀랍게도 근 몇 주 간 선생님이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

뭐, 유우카가 신경과민인 게 맞을지도 모르고 (실제로 키보토스 같은 도시에서는 그렇게 되기가 쉬우니까) 사실은 오늘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신 나간 암중비약도 없고, 길바닥에서 난동 부리는 비행소녀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유우카도 편히 앉아 쉬면서——

유우카의 전화가 울렸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은 적어도 유우카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사람이 흘릴 법한 것이었다. 발신자는 아리스. 걱정은 조금 덜었다. 게임개발부의 로봇 소녀는 이따금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게임개발부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수다를 떨곤 했다. 그는 (의도적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유우카의 무척이나 귀중한 정보원으로, 중간에 개입해서 정리해야 할 상황인지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응, 아리스. 아냐, 괜찮아. 웬일인지 일이 없는 날도 다 있네." 후배의 들뜬 수다를 들으며 비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으음. 새 게임? 너희 게임 제작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야." 문명…? 유우카가 어디선가 들어 본 기억이 있다. 노아가 지나가면서 이야기했거나, 아니면 에리두 사건으로 밀레니엄에서 도망치기 전에 리오 회장이 이야기했을지도……?

"역사적 배경? 흐음, 그래도 그걸로 지식을 쌓으면 안 돼. 응……. 그래……. 잠깐, 뭐라고?"

유우카가 항상 들어 익숙한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목소리로 아리스는 다시 말했다. "아리스는 독일의 파시즘으로 온 세상을 해방하고 있습니다, 유우카 선배!"

유우카는 지금까지 달려본 적 없는 속도로 게임개발부 부실을 향했다.


게임개발부의 판도를 결정짓는 변수는 단 하나. 아리스는 무엇을 할까?

아리스가 게임 방법을 학습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한 번 익숙해지고 나니 이 동아리 신입 부원이야말로 사실 궁극의 위협이었음이 드러났다. 아리스는 우선 방향부터 정하고 그 방향으로 가서는 다짜고짜 상대 문명과 치고박고 싸우기 시작했다. 시작 타일 운이 나빠서 고전 시대에서 한 판이 끝나버린 후, 유즈는 완충국 겸 제3의 적국으로 써먹게 AI 문명도 넣자고 제안했다.

아리스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 아리스의 용맹한 군대가 쓰러트릴 폭군이 늘었습니다!" 라고 선언하면서. 그러곤 아리스는 어떻게인지 원철이 매장된 타일을 세 개나 찾아내고서 불우한 이웃 폴란드를 마케도니아 중전차로 쓸어버렸다.

원철 타일을 확보하는 아리스의 운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딱 맞는 도시국가와 만나는 운도, 부족 마을이나 자연 경관을 찾아내는 운도, 말도 안 되는 도시 타일에 떨어지는 운도 마찬가지였다. 시작 타일 옆에 옥 타일 다섯 개가 몰려 있는 게 말이 되는가?! 다른 사람들이 현대 시대에 겨우 막 입성했을 때 대체 어떻게 3티어 정부까지 (전투 보정 때문에 항상 파시즘을 골랐다) 수립한 것인가?!

사이바 쌍둥이는 선생님의 조언대로 함께 상부상조하는 일이 많았다. 미도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이 게임에 열중이었는데, 방어적인 문명을 골라 안전하게 게임을 풀어나가며 상대 AI끼리 싸우도록 유도하고 스파이 공작으로 다른 플레이어를 훼방 놓는 것을 선호했다. 특히 모모이의 "나대다가 한 대 맞고 울며 집에 돌아오기" 스타일과 궁합이 잘 맞았다. 모모이가 잘 할 때는 정말 잘 했지만 (아리스의 지배 승리 게임에서 아리스를 제치는 것도 포함해서다), 못 할 때는 바닥 그 자체였다. 그래도 동생의 계획을 잘 가리는 훌륭한 연막 역할이었으니.

유즈는 운 없게도 아리스의 "해방"에 휘말리지만 않으면 손쉽게 한 판을 따냈다. 눈 깜짝할 사이 반응하는 그 반응속도와 어디 비할 데 없는 눈과 손의 협응능력은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에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그렇게 절약한 몇 초가 모여 모니터 가장자리에 메모를 할 시간을 게임개발부의 부장에게 벌어다 주었다. 메모 하나하나마다 승리를 거머쥘 철저한 전략이 적혀 있었고, 계획이 어그러질 때를 대비한 대응책과 그 대응책의 대비책까지 적혀 있었다. 유즈는 이제 사물함에서 나와 있는 시간이 더 길 정도로 불쾌하리만치 게임에 열정을 다했다.

게임 장비를 구하는 건 꽤나 간단했다. (엔지니어부에서 걸어다니는 미니어처 TV 겸 전투 로봇으로 개조하려던 컴퓨터 몇 대가 있었는데, 그 계획은 "모니터 쨩"이 폭주해서 실험장을 뛰쳐나가 지나가던 네루의 정강이에 시속 육십 킬로미터로 돌진한 후 폐기되었다. 그 이후 벌어진 아마겟돈에서 엔지니어부는 어떻게든 살아 돌아왔다.) 준비해야 할 것은 간식과 약간의 시간 뿐이었다.

아니면 상당한 시간이거나.

아니면 생각한 것보다 막대한 시간이거나.

유우카는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대참사의 현장에 발을 들였다.

"대체 어떻게 벌써 맵 절반을 다 먹은 건데?!" 비명이 울려퍼졌다. 모모이는 분노와 공포가 반 씩 섞인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으며 화면에 삿대질을 해댔다. 뺨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AI가 셋이나 있었다고!"

"알고 보니 넷이었습니다! 아리스는 AI 친구들을 주인의 폭정과 속박에서 모두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아리스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상대의 고난과 역경은 눈치채지 못한 게 틀림없다. 그 사이 아리스의 티셔츠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2]의 우울해 보이는 인물상과 비슷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잘 정렬한 회색 탱크와 기병 부대가 모모이의 누비아 군대 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군사력의 차이는 선명하게 보였고, 북쪽에 잘 군집한 회색 도시 군락과 남쪽에 흩뿌린 듯한 노란색 점을 보면 국력의 차이도 선명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하늘색 그리스 도시가 있고, 모모이를 지원하기 위한 원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미도리는 겉보기엔 차분해 보였지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보였다.

"유즈 선배, 도와줘!"

"그, 그렇게 못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뭘." 유즈는 유우카가 온 지도 모르고 감자칩을 씹으며 모니터에 얼굴을 딱 붙이고서 메모장에 무언가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유즈의 한국 문명은 맵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도시 몇 개인가를 소유하고 있었고 개중에는 무척이나 우주선 발사대를 닮은 수상한 건조물도 있었다. 유닛 수는 적었지만 다른 플레이어에 비해 고도한 기술이 엿보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도와주고 있는 거 아니야?"

"꼴랑 도시 하나 짜리잖아! 거기다 날 보고 전쟁광이라고 비난까지 했다고!" 모모이가 울부짖었다. "나를! 리얼타임으로 블리츠크리그[3]를 재현하고 있는 인간은 내가 아니란 말이야!"

"아리스는 평화광입니다! 강력한 화력의 평화광입니다!"

유우카는 헛기침을 했다. 마법이라도 부린 듯, 게임개발부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어, 안녕. 일을 하고 있는 걸로는 안 보이는데 말이야."

"유우카 선배, 안녕하세요! 아리스의 위업을 보고 기뻐해 주세요!"

"원래 그 대사가 아닌데[4]……." 유즈는 사물함에 틀어박히려는지 자기 사물함을 흘깃이며 웅얼거렸다.

"우아앙! 아리스가 V1 폭탄을 소환했어!" 그렇게 횡설수설 지껄이며 모모이는 소파 뒷편에 마련한 안식처로 기어갔다. 모모이의 군대는 그렇게 내팽개쳐져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미도리는 그 모습을 벙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윽. 자, 한 명씩 얘기해. 갑자기 전략 시뮬레이션을 시작한 이유는 뭐야? 너희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


"……. 그, 있잖아요, 선생님……. 전화, 다시 안 하실 거예요?" 핸드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를 눈으로 흘기며 아로나가 물었다. 유우카로부터 모모톡 메시지 열 개와 부재중 전화가 일곱 건 와 있었고—— 남자는 이미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안 하시면 유우카 씨가 오셨을 때 더 화내실 것 같은데요."

"뭐가 됐든 내가 살아날 길은 없을 것 같은데……."

Notes:

[1] (프랑스어) haute cuisine. 고급 레스토랑 또는 호텔에서 세심하게 준비하여 호화롭게 내는 요리의 총칭.

[2] 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문명 6의 독일 문명 지도자 중 한 명이다.

[3] (독일어) Blitzkrieg. 전격전으로 번역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술 교리. 강력한 기동부대로 적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전술 이론이다.

[4] 직전 아리스의 대사는 레드 데드 리뎀션 2 등에서도 오마쥬한 문구로, 낭만주의 시인 퍼시 셜리의 소네트 오지만디아스에서 등장하는 구절. 원문은 Look on my works, ye Mighty, and despair! (너희 강대한 자들아, 나의 위업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